백낙청 [白樂晴] (영문학자/문학평론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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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白樂晴] (영문학자/문학평론가)

화상 2022. 1. 1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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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白樂晴 1938.1.10~ ]

백낙청 [白樂晴 1938.1.10~ ]

백낙청 [ 白樂晴 1938.1.10 ~ ]

요약

문화평론가 겸 교수. 《창작과 비평》의 창간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민족문학론, 민족경제론 같은 담론을 형성하면서 그때까지 우리 문화계에 없었던 새로운 계간지 문화를 일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이며,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이다. 1938년 대구광역시 봉덕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에서 살아온 수원 백씨 집안이었으나,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납북되었다. 유년기에 아버지의 납북과 고향 상실이라는 가족사적 배경으로부터 분단의 고통을 일찍부터 체험했으며, 이 체험은 뒷날 민족문학, 분단극복 문학의 정서적 바탕이 되었다.

1954년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미국 뉴욕의 《헤럴드 트리뷴 Herald Tribune》 지가 주최하는 세계고등학생 토론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었으며, 19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학교에 입학해 영문학과 독문학을 공부하였다. 1959년에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63년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문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1972년 조교수가 되었다. 1965년 《분지》의 작가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평문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신동아》 《청맥》 등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1월 계간 《창작과 비평》의 창간 편집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평론지의 시대를 열었다. 《창작과 비평》은 민족문학론, 민족경제론 같은 담론을 형성하면서 그때까지 우리 문화계에 없었던 새로운 계간지 문화를 일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에 참여하였고, 그해 12월 교육부에 의해 징계파면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학교에 복직되어 1984년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1987년 9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하면서 시인 고은(高銀)과 함께 부회장직을 맡았다. 《창작과 비평》은 1980년 7월 전두환 정권하에서 출판사 등록 취소와 함께 폐간되었다가 1988년 봄호부터 복간되었고, 백낙청은 다시 편집인에 취임하였다.

1970년대에 세운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진보적 문학 논의에 끊임없는 동력원이었으나 그만큼 도전과 비판에 시달렸다. 보수주의 지식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에는 더 급진적인 이론가들로부터 ‘계급문제를 무시한 소시민적 이론가’로 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그의 문학이론은 ‘객관적 진리의 철저한 인식에 더 투철했다’는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면서 재평가되었고, 이후로도 활발한 평론과 저작 활동을 하였다.

제2회 심산상(1987), 제1회 대산문학상(1993), 제14회 요산문학상(1997), 은관문화훈장(1998) 등을 받았다. 주요저서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1979), 《민족문학의 새 단계》(1990),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1991),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 《흔들리는 분단체제》(1998) 등이 있다.

/두산백과(2022.1.15)

백낙청 [ 白樂晴 1938.1.10 ~ ]

요약

백낙청의 평론활동은 민족문학론의 정립을 목표로 하여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다.

1938년 1월 10일 대구 출생.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학을 거쳐 하버드대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로렌스(Lawrence)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 활동중이다. 1987년 제2회 심산상을 수상하였다. 1965년 『신동아』에 평론 「피상적 기록에 그친 6‧25 수난」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부터 계간 『창작과비평』의 창간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1966), 「시민문학론」(1969),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1973),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1974), 「민족문학의 현단계」(1975), 「인간해방과 민족문화운동」(1979), 「민족문학론의 새로운 과제」(1980), 「리얼리즘에 관하여」(1982), 「민족문학의 민중성과 예술성」(1986), 「오늘의 민족문학과 민족운동」(1988), 「통일운동과 문학」(1989),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1990) 등 많은 평론을 발표하였다.

평론집으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2』(1978, 1985),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1979), 『민족문학의 새 단계』(1990),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1991),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 등이 있다. 백낙청의 평론활동은 민족문학론의 정립을 목표로 하여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다.

서구 시민문학과의 대비를 통한 한국의 시민문학논의에서 발전한 그의 민족문학론은 1970년대에 이르러 그 뿌리가 민중문학론에 두어져야 함을 밝혔고, 계속해서 「제3세계와 민중문학」 등의 글을 통해 민족문학과 제3세계 문학과의 연대를 주장함으로써 그 지평을 넓혀 왔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그의 민족문학론은 통일지향의 문학론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처음부터 리얼리즘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거니와 로렌스, 톨스토이, 엘리어트, 엥겔스 등의 외국문학에 대한 연구도 리얼리즘론의 일부를 이루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2022.1.15)

백낙청 [ 白樂晴 1938년 ~ ]

문학평론가 · 영문학자. 경북 대구(大邱) 출생. 1955년 경기고교 졸업.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영문학 · 독문학을 전공, 1960년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서울대 문리대(文理大)에서 교편생활을 시작. 1965년 〈조선일보(朝鮮日報)〉 · 〈신동아(新東亞)〉 · 〈청맥(青脈)〉 등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66년 1월 계간지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을 창간, 문단의 체질계선(體質改善)과 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과거 문예지들의 고식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참신한 편집을 했다. 이 잡지 창간호에 발표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66)는 한국 문단의 병리적(病理的) 구조와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포괄적으로 분석한 그의 본격적인 논문으로서, 이 논문에 의해 일약 비평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이후 《서구문학(西歐文學)의 영향과 수용》(67), 《역사소설과 역사의식》(67), 《소설 「이성계」에 대하여》(67), 《김수영(金洙暎)의 시세계》(68), 《콘라드론(論)》(69) 등 역작들을 속속 발표, 문단의 복고주의 · 허무주의 · 몽매주의를 비판, 올바른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에 입각한 진취적 작품들을 옹호했다. 특히 《시민문학론(市民文學論)》(69)은 깊이 있는 역사적 전망 위에서 60년대의 사회와 문학을 분석한 대작(大作)이다. 1969년 다시 도미, 1972년 하버드 대학에서 D.H.로렌스에 관한 연구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의 논문으로는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73)이 있으며, 그밖에 〈영어영문학〉지에 몇 편의 영문학 논문들을 발표했다.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1973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발표한 논문. 문학이 자기의 건강성과 창조성을 확보하기 위한 철학적 · 사회학적 · 미학적 근거를 이론적으로 구명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시대에 있어서 문학은 하나의 단순한 전문분야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았다.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조차도 인간주의적 · 인정주의적 왜곡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그 자신의 표현수단과 표현기법을 화려하고 교묘하게 개발하기는 했으나, 인간의 문제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는 인간과 적대관계에 서게 되기까지 하였다. 비인간화는 현대예술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문학은 인간에게로 돌아와야 된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인간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 인간소외 및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사회체제와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만 올바르게 이루어지며, 문학자가 시민의식 · 민중의식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것은 단순히 순수문학 · 참여문학이라는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본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삶과 문학을 실천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런 문학의 예를 김수영(金洙暎) · 김정한(金廷漢) 같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2022.1.15)

백낙청

백낙청(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은 한국의 대학교수,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백붕제의 아들로 대구 출신이다.

이력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는 6.25 때 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부임하였고, 1966년부터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을 맡아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4년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으나, 1980년 복직되었고,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이후에도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일하며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가족관계

* 아버지 : 백붕제(1910년 ~ ? )

* 큰어머니 : 안숙온( ? ~ 1927년), 순흥안씨(順興安氏) 안병탁(安炳卓)의 딸

* 이복형 : 백낙환(1926년 ~ ), 인제대학교 이사장

* 어머니 : 최귀란(1911년 ~ ?), 월성최씨(月城崔氏) 최세진(崔世軫)의 딸

* 누나 : 백순영(白純英, 1936년 ~ )

* 부인 : 한지현, 대학교수

* 장남 :

* 차남 :

* 동생 : 백낙돈(白樂曒, 1939년 ~ )

* 동생 : 백낙서(白樂曙, 1945년 ~ ), 인제대 석좌교수

* 제수 : 김윤희(金潤喜, 1949년 ~ ), 대학교수 (김치열의 딸)

* 동생 : 백미영(白美英), 단국대 교수, 피아니스트

참고서적

* 《관악 초청 강연 백낙청 :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백낙청 , 권영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 9788952104618

* 두산백과사전 - 백낙청

같이 보기

* 창작과 비평

* 서울대학교

* 백붕제

* 백낙환

/위키백과(2022.1.15)

백낙청

白樂晴 [ 1938년 1월 10일 ~ ]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정치 평론가. 본관은 수원(水原)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발간인으로 유명하다.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순수문학을 비판하고, 민족문학, 참여문학을 주창하며, 이에 대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나아가 이를 세력화하여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제시한 민족 문학론, 분단 문학론은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반독재, 반미 운동 등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쓰는 문학가가 아닌 문학 평론가에 불과하지만 현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원로', '정신적 지주' 대우를 받으며 '문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또한 정치 평론, 논쟁 등에 참여하고 선거 때 후보 단일화를 주도하는 등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생애

1938년 1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고등문관시험 출신의 친일 관료였던 아버지 백붕제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귀란(崔貴蘭)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가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 백붕제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당시에도 고위 친일 공직자였기 때문에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고등학교 때 이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경기고 재학 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주최하는 세계 고교생 토론 대회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한 바 있다.

해당 영상은 1954년 당시 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담고 있다.

1956년 UN이 주최한 만 17세 미국 교환 고등학생 4명 중 1명인 한국 대표로 출연했다.

브라운 대학교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 연설을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친 후 일시 귀국하여 군 복무를 마쳤는데, 친일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 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인터뷰에서 사실은 귀국하면 입대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미국 생활이 싫증나서 귀국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시 하버드 대학교로 가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서울대에 교수 자리가 나자 귀국하여 1963년 25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1월 당시 27세로 서울대 전임 강사이던 때에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 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그는 순수문학을 “지배 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도구라고 폄훼, 비판하면서,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과 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그는 문인을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을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이라고 주창했다.

그 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진보적 평론 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창비는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완역하였다. 이 책은 한국의 진보 문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974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다.

1974년 11월 고은과 함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는 한국의 진보, 참여 문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잡았으며, 1987년 '민족 문학 작가 회의'로 확대 개편되었고 2007년 '한국 작가 회의'로 또다시 명칭을 바꾸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백낙청은 꾸준히 참여하면서 이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백낙청은 자신이 발행하는 창비와 작가회의 활동을 통해서 참여문학, 민중 문학계의 대표주자로 고은을 띄워주기 시작한다. 백낙청은 당시 성추문으로 얼룩져 있던 고은의 과오를 철저히 묻어둔 채 고은을 '우리 문학사의 우뚝한 존재,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고 찬양하여 고은을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고 보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선거 때마다 진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민주 개혁 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민주 개혁 진영이 보수 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선출되지도 않은 권력인 이른바 '진보 원로'가 왜 민주적 정당성도 없이 뒤에서 정치인들을 배후 조종하느냐"란 이의 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된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보수로부터 받는 비판보다 진보로부터 받는 비판이 더 크다. 후보 단일화로 진보 진영을 민주당계의 '민주 개혁' 세력의 종속물로 만들고, 계급적 좌파 정치 세력보다 우파 정치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2002년 국내유일의 시청자 참여방송인 재단법인 시민방송 RTV의 이사장역할을 맡았다.(2007년까지)

2003년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정년 퇴임 이후에도 민족 문학론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등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연방제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연방제 전도사'라고 불린다.

2005년 6.15 공동 선언실천 남측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북핵문제에 관해서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전 보장을 해주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이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말기에 진보 계열에서 조차도 노무현 정부가 실패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노무현 개인의 스타일 때문이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는 "참여정부에 모든 책임 있는건 아니다. 책임은 참여 정부에도 분명히 있고, 진보개혁세력에도 있고 보수적인 거대 야당이나 거대 언론에도 골고루 있다. 참여 정부의 책임 중에서도 정부의 정책 실패와 대통령 통치 스타일에 관한 부분 등을 구별해야 한다. (국민 지지도 하락에) 정부의 정책 실패도 있고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한 면도 분명히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범여권 후보 단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를 이끌었다.

2010년 천안함이 폭침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정부 발표는 모두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가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안함의 침몰은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남북 대결 상태를 원하는 어떤 세력들이 침몰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러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며 일축했다. 천안함 사건 민군 합동 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고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자 “이번 대통령 담화는 거의 초법적인 조치였다. (중략)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은 7·7 선언 이래 남북 관계 22년의 성과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 관계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주의를 다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행위다. (중략)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시불로 정변을 일으켰고, 전두환은 12.12와 5.17의 2회 할부로 헌정 질서를 뒤집었다. 이번 정권은 군사 쿠데타를 안하는 대신 5년 장기 할부제로 야금야금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일종의 쿠데타에 비유하며 극렬히 반발했다. 백낙청은 이후 각종 강연과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천안함 폭침의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특히 2015년에는 신경숙표절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표절인데도 '의도적 표절로 볼 수 없다.'며 무리하게 실드를 쳐주다가 역풍을 맞은 것.

2015년 11월 25일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그와 사제 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후 공적인 자리에 등장하지 않았다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자살하자 시민대표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3. 가족 관계

백부가 백병원으로 유명한 백인제이다. 형은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백낙환이다.

먼 친척으론 12촌 지간의 시인 백석백선엽, 백종원이 있다.

원불교 여성회 초대 회장 및 사단 법인 한울안 운동의 대표를 맡은 한지현 前 광운대 교수가 부인이다.

장녀 백영경(白英瓊)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 창비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남 백웅재(白雄在)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미식 평론가 및 전통주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 차남 백연재(白然在)는 호주국립대학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4. 비판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칼날 속에서 저항한 공이 있으나 그런 그에게도 과가 존재한다. 가장 큰 과는 성추행을 일삼기로 악명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일관한 고은 시인을 한국 문단의 원로 위치에 올리고 과감하게 내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고은의 성폭행 문제를 고발하지 않고 묵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권력이 없었더라면 일개 파계승 시인에 지나지 않을 고은을 한국 문단이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까지 고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최종적으로 그가 묵인했기 때문이다. 고은의 성폭행 논란은 성범죄를 시작한 고은이 뒤늦게 정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흐지부지되었으나 백낙청에 의해 뒤틀린 한국 문단의 구조를 청렴하게 개편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순수문학계의 주 창작층이자 주 수요층인 페미니즘 진영의 경우 고은 시인의 만행에 뒤늦게라도 미투 운동으로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였으나 이를 묵인한 백낙청에게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다. 결국 어떤 이유라도 페미니즘 진영과 한국 진보 및 좌파는 백낙청의 오점을 공론화하길 거부하듯 고은의 논란 당시부터 2년 넘게 침묵하고 있다.

또한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북한이 (주로 안보 문제로) 논란과 사건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주로 다른 세력이 북한에 악영향을 준 것이라는 논점일탈을 고집하기만 하였다.

또한 한국 순문학계에서 주변 문인들이 도서정가제를 강력히 추진할 동안, 백낙청은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입장을 표한 적이 없어 독자들의 도서정가제가 악법이라는 호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생겼다.

/나무위키(20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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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18 - “국가적 비상시국…거국체제 구성을”

백낙청 교수 주장…“정부-정치권-시민사회 소통해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한겨레

진보진영 원로인 백낙청(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8일 최근의 상황을 “단순한 경제위기를 넘어선 국가적 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하면서,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협력하고 정부·정치권·시민사회가 동참하는 거국체제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현 위기를 기존의 틀 안에선 수습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가 협력하여 폭넓은 중도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또 정부 및 정치권, 시민사회가 동참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체제, 일종의 거국체제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 절박해진 시위군중과 정부 강경책이 맞부딪치면 ‘용산 참사’의 연쇄발생과 대형화가 우려된다. 이런 참사 때 시민들이 분노를 삭이며 물러서리라 기대하는 건 우리 국민과 한국 현대사를 너무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며 “그 결과는 최악의 교착상태와 ‘나라 다스리기’(거버넌스) 체계의 붕괴에 다름 아니다”라고 예측했다.

그는 “거국체제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초헌법적 발상이 아니다.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고 오로지 (결정)내용의 합리성과 국민 지지에 의존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라며 “정치권과 시민사회 지도급이 소통하는 베이징 ‘6자 회담’ 식의 느슨한 모임이 현실적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기존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지 않은 것 같지만, 비상한 처방이 아니고는 넘길 수 없다는 인식은 어차피 확산될 것”이라며 “진보개혁 세력도 정부를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습관화된 대응을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찬수 기자 pcs@hani.co.kr

/한겨레 2009-02-18 오후 09:09:12

2007.3.20 - [기고] ‘경제주권’ 챙긴 뒤 당당히 만나라 / 백낙청

남북정상회담과 한-미 FTA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실리적이고 상식적인 협상 바탕 위에 성사되는 남북 정상회담이야말로 금상첨화-비단 천에 꽃을 수놓은 격이 되지 않겠는가.”

남북 정상회담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두 굵직한 현안이 임기 막바지의 노무현 대통령 앞에 놓여 있다. 둘 다 아직 성패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들 현안 처리 결과에 따라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크게 갈릴 것이며, 두 과제만 잘 풀어도 노 대통령이 다짐한 대로 ‘레임덕’은 없을 공산이 크다.

남북 정상회담은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남긴 숙제 가운데 하나다. 햇볕정책 계승과 한반도의 화해·협력을 추진해 온 참여정부로서는 당연히 겨냥할 목표이기도 하다. 회담을 위한 여건 또한 최근에 부쩍 좋아졌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국내 지지여론이 과반수를 훨씬 넘는데다 얼마 전까지 ‘정략적’인 정상회담 기도를 규탄하던 한나라당 지도부조차 반대의사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고, 비록 곡절은 있었지만 참여정부가 공들여 온 한반도 평화·번영 정책 및 ‘한반도 문제의 한국 주도’ 노선이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정략을 개입시키려는 유혹이 오히려 감소했으며, 이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레임덕 없애줄 역사적 과제

북-미 관계 획기적 개선

한나라도 반대 철회한 호기

실제로 북-미 관계가 급박하게 진전하는 도중의 어느 대목에 남북 정상회담을 끼워넣는 것이 마땅할지는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너무 서둘러서 북-미 관계 진전에 혼선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만, 미국하고 다 잘 풀린 뒤에나 움직이려 해서는 북한과 미국 어느 쪽에서도 옳은 대접을 못 받게 된다.

여기서 정부가 최적의 시기를 찾아내어 정상 사이 만남을 성사시킬 때 적어도 한반도 평화문제에 한해서만은 뚜렷한 성과를 남길 것이다. 그 만남이 김정일 위원장이 일찍이 (막연하게) 약속했던 ‘서울 답방’일 필요는 없고, 2000년 평양회담에 견줄 획기적인 내용을 갖추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굳이 획기적이지 않아도 되는 남북 정상 사이 만남들을 정착시켜 간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선포를 위한 부시 대통령과의 3자 정상회담(또는 중국을 포함한 4자 회담)도 이를수록 좋지만, 만약에 연내 실현이 어려울 경우 미국에서는 부시의 임기 중이지만 한국에서는 새 대통령 취임 이후가 될 내년 상반기쯤으로 일정을 잡는 데 남북 지도자가 공감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평화체제 구축에 한 발 다가가는 동시에 미국 쪽과 국내 대권주자들의 협력의지를 북돋우는 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문제가 정교한 판단을 필요로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편한 국면으로 진전해 왔다고 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한편으로 4월 초 시한을 어떤 식으로 넘기건 대통령이 편해지기는 어려우리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다른 한편 대통령의 판단이 의외로 그다지 정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최적의 시기 선택 중요

‘내년 상반기’ 합의할만

‘새 대통령+김정일+부시’도

판단의 기준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실익 위주로 면밀하게 따져서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이익이 안 되면 체결 안 할 것”이며, “(미국 행정부에 부여된) 신속절차 안에 하면 아주 좋고, 그 절차의 기간 내에 못하면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그 이후까지 지속해서 갈 수 있다”라는 지난 13일 국무회의 발언이 그것이다.

이 말이 한갓 면피용이 아닌 한, 여기 제시된 기준이야말로 우리의 외교와 국방에서 ‘자주 대 동맹’ 같은 이념적 구도를 배격하고 실익 위주의 자주성과 동맹관계를 추구해 온 정부 노선의 재현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한반도 문제 해결에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과도 정확히 맞아드는 것이다.

이 점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실익 위주로 면밀하게 따져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전문적인 식견 없이 뭐라고 말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그러나 첫째, 협상 내용 대부분을 전문가들에게조차 비밀에 부쳐온 그간의 과정이 우리 쪽의 협상력을 상대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대외적인 목표보다 협상팀을 국내 제약으로부터 좀더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대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바 큰 것 같다. 동시에, 알려진 내용만으로도 수많은(결코 쇄국주의자도 교조적인 진보주의자도 아닌) 전문가들이 협상이 우리 실익에 위배됨을 거듭 지적해 왔다. 이들의 지적이 다 맞는다는 보장은 없고 설혹 맞는다 해도 번번이 우리의 실익을 챙기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문제점이 지적되고 사회적 논란이 뜨거워졌으면 미국 정부의 일정에 맞추기보다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그 이후까지 지속해서” 점검하고 토론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상식일 터이다.

‘철저한 실리 협상’ 기대

졸속강행 타결땐 ‘정략’ 낙인

‘평화·개혁·진보’ 신명나게

남북 정상회담과 연관시켜서 살피면 이런 상식의 중요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전시 작전통제권이 없는-최소한 그걸 넘겨받을 약속조차 못 얻어낸-남쪽 대통령이 북쪽 정상과 만나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가 면구스러울 것이듯, 정부의 공공정책 수행이 미국의 투자자한테 언제든 제소당할 수 있는-더구나 그랬을 때 자국 사법부의 판결을 받아볼 기회마저 박탈당한-나라의 지도자가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이라든가 ‘한반도 경제통합’을 자신있게 토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상회담은 국민적인 지지 속에 이뤄져야 제대로 힘을 받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국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빅딜’ 타결에 맞선 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라면 회담은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정략’의 혐의를 다시금 뒤집어쓸 것이고, 실제로 국면 전환에 큰 성과도 없을 것이다. 자칫하면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도 참여정부는 “평화·번영 정책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정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표방해 온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 점점 더 심각해질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끝으로 노 대통령은 “경제외적 문제는 고려하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나로서는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상식에 맞게 해결해서 장기적인 과제로 끌고 갔을 때 펼쳐질 신명나는 판국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유독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해서만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내면서 한-미 경제통합 달성과 ‘레임덕’ 촉진이라는 일석이조의 단꿈에 젖었던 보수언론은 당연히 실망할 것이다. 협정 강행·타결의 결과로 극단적인 진보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던 일부 세력도 그러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연대운동, 일부 관료 및 국회의원들의 분발, 여기에 대통령의 자주실리 외교 노선에 따른 소신있는 결단이 합쳐 협정의 졸속 타결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 역사는 또한번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선진화를 이룩할 것이다. 평화·개혁·진보를 추구해 온 우리 사회의 다수는 용기백배할 테고, 각자의 강조점이 다른 것이 지리멸렬의 원인이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계기로 바뀔 것이다.

이럴 경우 미국은 어떻게 나올까? 참여정부 초기의 자주성 강조가 한-미 동맹의 파탄을 가져왔다고 한숨짓던 이들의 우려와 달리, 미국이 옛날만큼 고분고분하지 않은 한국에 대한 일시적인 불쾌감을 떨치고 새로운 현실에 점차 익숙해진 경험을 상기하면 그 답은 명백하다. 당장에 어떻게 반발하건, 협정 졸속강행 실패에 대한 불만을 조만간 삭여낼 것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협정을 아주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4월) 이후까지 지속해서 갈” 작정이라는데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대국을 쉽사리 등질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그렇게 또 한번 우리 사회의 저력과 자주성을 과시한 뒤에야 비로소 한국에 대한 존중심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할지 모른다. 이런 바탕위에 성사되는 남북정상회담이야말로 금상첨화-비단천에 꽃을 수놓은 격이 되지 않겠는가.

백낙청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사진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한겨레 2007-03-20

1966.1.15 - 백낙청, ‘창작과 비평’ 창간

오늘의 역사 (1월 15일)[1966년] 백낙청, ‘창작과 비평’ 창간

‘창작과 비평’(창비)은 ‘문학과 지성’(문지)와 더불어 1970년대 국내 지성계에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해 준 ‘지성의 산실’이었다. ‘창비’가 실천적 이론에 비중을 두고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다면 ‘문지’는 이론적 지성으로 현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창비’는 1960~1970년대의 지성인들에게는 ‘저항의식의 저수지’이자 ‘문학 비평의 호수’였으며 다양한 진보 담론의 발상지였다.

이 ‘창비’를 창간한 주역은 백낙청(1938~)이다. 백낙청은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9년 브라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0년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돌아와 군에 입대했다. 1963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가 된 백낙청은 순수문학이든 관변문학이든 기성문단에 도전하겠다며 1966년 1월 15일 132쪽 분량의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다.

창간호(1966년 겨울호)에는 편집인 백낙청의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비롯 장 폴 사르트르와 찰스 라이트 밀즈의 번역글, 김승옥과 이호철의 단편소설 등이 실렸다.

한자 표기를 줄이고 가로쓰기를 도입한 창간호 2,000부는 지식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그런대로 팔려나갔으나 2호부터는 실적이 좋지 않았다.

창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백낙청이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의 잡지사를 설립한 1969년이었다. 이문구, 황석영, 신경림, 김남주, 현기영, 강만길, 리영희 등 스타 글쟁이들이 창비와 인연을 맺었다.

1974년 1월 창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도서출판 ‘창비’를 설립해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1975년 1월 신경림의 ‘농무’, 조태일의 ‘국토’로 시작한 ‘창비 시선’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잇달아 내면서 토속적이고 저항성 강한 시인들의 활동공간 구실을 했다.

창비는 유신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호철, 송기원, 윤흥길,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등 창비 문인들이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1974.1)에 대거 참여하고 1974년 11월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설립을 주도하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조선닷컴 2017-01-15

1938.1.10 - 한국의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백낙청(白樂晴) 출생

백낙청 [白樂晴 193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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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10 - [백낙청] "천안함 진실규명, 민주회복-남북관계 개선의 결정적 고리"

[6.15 공동선언 10주년 연속 인터뷰]<2>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6.15 공동선언 10주년 연속 인터뷰 두 번째 주인공은 백낙청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다.

백낙청 명예대표는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6.2 지방선거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바닥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반전한 결정적인 계기"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백 명예대표는 남북관계 개선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묶어주는 당면한 과제는 천안함 침몰 진실 규명이라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단체제론'을 정립한 이론가이자 6.15 남측위원회를 직접 이끌었던 실천가인 백낙청 명예대표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중 한 사람이다. 다음은 지난 7일 서울 서교동 세교연구소에서 있었던 백낙청 명예대표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편집자>

▲ 백낙청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이번 선거, 우리 역사의 명운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될 수도"

프레시안 : 6.2 지방선거 결과 어떻게 보나.

백낙청 : 우리 국민들이 간단치 않다는 게 또 한 번 입증됐다. 이번 선거는 긴 역사적 안목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바닥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반전한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받으리라고 본다. 우리 역사의 명운이 갈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겨우 한숨을 돌린 형국이다. 앞으로도 계속 하루하루 싸우고 또 싸우는 힘든 나날을 보내야 되지 않나 싶다. 4대강사업도 그대로 남아 있고, 정부가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것 같다.

이제 우리는 4대강에 대한 민심의 반대를 확인했다는 데 만족하지 말고, 사업의 중단을 계속 요구하면서도 기왕에 벌여놓은 사업 중에서 어떤 건 그래도 괜찮으니까 계속 하고, 또 중단했을 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할 일이 참 많다.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도 계속되리라고 봐야 하고, 정부의 무리한 정책에 반대했다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고 잡혀가기도 하는 언론인들이나 공무원노조, 전교조 등 각계각층 사람들의 싸움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제가 절실한 문제로 걸려 있다고 생각된다.

프레시안 : 선거결과는 천안함 조사발표에 대해 민의가 인정하지 않은 것 아닌가?

백낙청 : 천안함사건을 이용해서 선거를 이겨보겠다는 소위 북풍 공작에 민의가 휘둘리지 않았다는 건 입증됐지만, 천안함의 진실이 뭔가에 대해서는 아직 민의의 판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앞으로 우리가 노력해서 규명하고 책임을 물을 건 물어야 한다.

프레시안 : 백 교수께서는 지난 5월 "어뢰냐 아니냐, 북한의 소행이냐 아니냐 같은 문제에 매달려 있는 건 이 정부가 설정한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다. 시민들의 프레임으로 바꿔 봐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낙청 : 정부가 천안함을 다루는 태도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적어도 대통령 자신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근거가 없다고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점차 북한의 소행인 것 같다는 식으로 몰고 가면서 점점 북풍을 일으키려고 했다.

4월 중순부터 그러다가 5월 13일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는데,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이 '외부 공격'이란 표현을 썼다. 그 전까지는 '외부 폭발' '외부 충격'이라고 했는데 '공격'이란 말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15일에 소위 '결정적 증거'가 인양됐다.

내가 '북한-어뢰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 건 5월 11일이었는데, 발언을 한 현장에서 기뢰폭발설 등 여러 가상 시나리오에 관한 얘기가 길어지는 걸 보고 했던 말이다. 정부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어뢰냐 기뢰냐에 너무 집착하는 건 정부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는 민주시민의 입장에서 이 정부가 이런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는 정부냐 아니냐, 과거 행태에 비춰볼 때 국민을 기만하고 우롱할 수 있는 정부냐 아니냐, 프레임을 그렇게 바꾸자는 말이었다.

당시로서는 타당한 주장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정부가 소위 '결정적 증거'를 들고 나와서 북한의 소행이었다고 단정하고 구체적인 북한봉쇄 작전을 벌이는 마당에서는 이제 그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 과연 결정적인 것이냐, 진실이 뭐냐를 규명하는 게 최대 과제다. 많은 전문가들과 상식을 가진 시민들, 지식인들이 조사결과 발표도 부실하고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도 너무나 말바꾸기가 많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정부가 필요한 정보를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보를 못 가진 입장에서 좌초였다거나, 좌초됐다가 이초(離礁)하는 바람에 제2의 사건이 벌어졌다거나, 어뢰가 아니라 기뢰였다는 식의 얘기에 너무 집착하는 건 지금도 올바른 대응책이 아니다.

대신 지금 나온 발표가 엉터리 같다, 말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으니 해명해라, 왜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생존자들과의 접근도 차단하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부분적인 정보밖에 없는 상태에서 대안적인 시나리오를 내놓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물론 정부에 제대로 된 조사를 하라고 압박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어뢰설보다 당신들이 최초에 유족들에게 발표했다는 좌초설이 그래도 신빙성이 더 있지 않느냐, 어뢰라고 하면 북이 한미 합동군사훈련 도중에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서 한국과 미국의 군대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런 시나리오보다는 기뢰라고 하는 게 당신들 자존심을 위해서 차라리 낫지 않느냐, 이런 식의 수사적 방편으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안 시나리오를 내세울 능력이 우리에겐 없고, 그런 과욕을 부릴 필요도 없다.

프레시안 : 중국이 남·북·미·중 4개국 공동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낙청 : 공동조사는 바람직하다. 북에서 검열단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검열단이라는 게 그쪽 문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참 적절치 않은 표현이었다. 어쨌든 검열단 제안이 왔을 때 우리 정부는 유엔사령부 조사결과를 가지고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할 테니 거기 나오라고 역제의를 했다. 군사정전위는 지금 거의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인데 그걸 되살리겠다고 하니까 북에서는 '이제 와서 무슨 정전위냐'고 하면서 안 받았다.

그런데 남·북·미·중 4개국의 공동조사를 하자는 중국의 일종의 수정제안은 정전위 기구를 재활용하자는 남쪽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조사한 것을 갖고 와서 심문을 받아라, 야단 좀 맞고 가라는 게 아니라, 조사 자체를 4개국이 하자는 거니까 북은 마다할 이유가 없고 남쪽 정부도 자신 있으면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제안이다.

그런데 만약 사실무근을 가지고 정부가 이렇게 해놨다면 어떠한 공정한 조사 제의도 받기 어려운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은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5월 11일 시점에서 '북한-어뢰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일종의 영구미제(永久未濟) 상태로 끌고 가면서 북의 소행이라는 냄새만 잔뜩 피우다가 선거가 끝나면 적당히 물러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찌 보면 우리 정부의 과감성이랄까 저돌성을 내가 과소평가 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웃음)

그러니까 나쁘게 보자면 적당히 장난치려고 했는데 장난이 너무 심해서 장난이 아니게 돼버린 것이다. 이제 정부는 추가자료를 제시해서 국민과 국제사회를 납득시키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망신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길이 없어졌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나라가 망신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적어도 나는 안 그렇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통킹만 사건처럼 오랫동안 진실을 묻어놓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나 네티즌들이 문제제기하는 걸 봐라.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뚜껑을 눌러놓고 무한정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가 어떻게 수습을 할지 모르겠다. 국제사회가 정말로 납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과거 김일성 주석이 김신조 사건에 대해 '나는 몰랐다'고 했듯 대통령이 '나는 몰랐다. 허위보고에 속았다'고 할 것인가? 그것도 간단치 않다. 우리는 북한 체제와 다르다. 정말 걱정이 되지만 어쨌든 진실에 입각해서 수습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시민사회는 진실과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선거를 앞둔 야당 같으면 '북한 소행이라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었냐. 안보무능 아니냐. 차라리 참여정부가 안보에 유능했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정부가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이 없을 때는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에 입각해 문제를 풀어 나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그 외엔 길이 없다고 계속 얘기해야 한다.

▲ ⓒ프레시안(최형락)

한국 혼자 북핵 풀 수 있다는 착각

프레시안 : 올 초만 해도 정상회담 추진설이 나왔었는데

백낙청 :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이명박 대통령 자신은 국내문제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뒤집는 아젠다를 밀고 나가더라도 남북관계만큼은 실용적으로 대처할 생각이 없지 않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이 분이 개인적으로 남북관계에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주변 참모들이 오도해서 그랬던 건지, 북한의 비핵화라는 게 남한이 요구하면 북한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로 나왔다. 비핵화 문제는 북미관계에서 풀어야 하고, 그걸 풀기 위한 6자회담 프레임이 만들어져 진행되고 있는데 '비핵·개방·3000'이란 걸 들고 나와서 일을 꼬이게 했다.

또 하나는, 남북관계 발전과 국내 민주화의 진전은 크게 보면 맞물려 진행된다는 게 내가 과거부터 해왔던 주장이다. 물론 일대일로 조응하는 건 아니다. 남북관계가 한걸음 앞서가기도 하고 반대로 민주화가 앞서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맞물려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에 무리한 일을 해대다가 촛불시위를 비롯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그때 그런 민의를 수용해서 정책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탄압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 결국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동력도 없어지게 됐다. 오히려 남북대결을 추구하는 세력에 의존해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갈팡질팡 했고, 남북관계가 한참 악화되다가는 또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북미관계도 풀려가는 모양인데...' 하면서 정상회담도 추진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첫째는 정상회담을 만들어낼 실력이 부족했다. 정상회담의 실현이란 건 굉장히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조율하고, 준비하고, 성사를 위해 자제할 일은 자제하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통령 자신이나 주변인사들이 그런 실력이 없었다.

또 정상회담을 하려면 국내정치에서도 국정운영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뜻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국민의 불만을 사고, 그런 상태에서 지방선거를 치르게 되고, 그러다가 천안함을 둘러싼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진상은 확실히 모르지만 북측의 어뢰 공격이라기보다는 해군이나 국방 당국에서 은폐하고 싶은 유형의 어떤 사고였을 가능성이 있고, 대통령은 북한소행으로 몰고 가려는 일부 언론이나 국방 당국에 비해 처음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사고를 이용해서 남북대결상태를 복원하려는, 다시 대결상태로 몰고 가려는 세력이 선거를 앞둔 단기적인 정략적 계산도 겹쳐 정부 안팎에서 득세하면서 일을 벌이다 보니까 이제는 이 나라를 온통 딴 나라로 바꿔놓거나 아니면 외교와 국내정치에 있어서의 참담한 실패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프레시안 : 천안함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를 미국이 전폭 지지했다. 왜 그럴까?

백낙청 : 글쎄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서 왜 이러느냐 묻고 싶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했을 때 한국의 시민사회가 걸었던 높은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건 이미 오래 됐다. 그렇게 된 데에 북측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또 어떻게 보면 경하할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한국이 미국이라는 큰 나라의 발목을 잡는 실력이 옛날에 비해 월등해졌다. 국력이 신장한 결과 적어도 한반도문제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발목 잡는 실력을 적잖이 발휘했다.

게다가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세밀히 살펴볼 경황도 없는 처지이고, 그 밑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옛날 얼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지 않나 싶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본다.

천안함사건과 관련해서는, 미국은 초기에는 한국 정부에 자제를 당부하는 등 비교적 신중했다. 그러다가 변했는데, 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하는 길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미국으로서는 일종의 꽃놀이패다. 한국이 이 문제를 가지고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거나 북을 무력으로 공격하는 사태만 없으면 나머지 상황은 단기적으로 미국에 이득이 되는 게 너무 많다.

천안함사건의 진상이 한국 정부의 발표와 다르다는 걸 미국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걸 미국이 밝힐 의무가 없다. 한국 정부가 우기면 '그래, 너희들이 그렇다고 하니 우리가 우방으로서 밀어주겠다'고 하면 되고, 그렇게 해준 만큼 한국 정부에 대해 채권 하나를 더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 나중에 한국 정부를 압박해서 대가를 받아낼 수 있다. 당장 무기를 파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해군력 증가하겠다고 하면 어디서 무기를 사오겠나?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압박 카드가 된다. '한국 정부가 국제조사단을 만들어서 이런 결과를 도출했는데 책임 있는 대국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몰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말을 듣지는 않겠지만, 안 들으면 안 듣는 대로 미국한테 손해될 게 뭐가 있나. '우리는 정당한 요구를 했는데 중국은 북을 비호하기만 하더라'고 하면 끝이다.

중국도 일방적으로 북을 비호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으니까 공동조사를 하자, 결과가 나오면 그 누구도 비호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미국도 조금 움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보리에서 자기네들이 적극적으로 뭘 해보겠다는 소리가 쑥 들어갔고, 서해 군사훈련을 연기했다. 서해에서 훈련을 하면 사실 북한보다는 중국을 겨냥하는 성격이 큰데 그런 걸 할 수 있게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이미 오키나와 기지이전 문제에서 천안함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양보를 받아내는 등 재미를 톡톡히 봤다.

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까지 동참해서 북을 봉쇄해서 북이 가령 무너진다면 상당수의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 일이다. 그렇게까지 되진 않더라도 어쨌든 북에 대해 압박효과가 있는 것이다.

천안함사건이 있기 전까지 미국은 북한에 대해 6자회담에 나오라고 하고 북은 제재를 해제하면 나가겠다고 다소 고자세를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이 6자회담을 열어주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생색을 낼 판이다. 지난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서 중국더러 6자회담이 성사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북한도 6자회담에 나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천안함정국으로 단기적 실속을 차리고 있지만…

이처럼 단기적으로 볼 때는 미국이 실속을 차리고 있는데, 그러나 만약에 천안함사건에 대한 합조단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면, 더구나 충분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알고도 한국에 동조했다는 게 장차 밝혀진다면,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손상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국민들은 1980년대의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 없다.

광주 학살을 미국이 주도했다는 건 과장된 해석이지만, 그걸 용인하고 전두환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손해를 봤나. 이번 일이 그 정도까지는 아닐 수 있지만, 그에 버금가는 손상을 입을 수 있다. 한국 국민들하고는 단단히 의를 상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을 미국이 지금 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완전히 두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 천안함에 대한 국제적 행동을 한국이 주도하면 지지하겠다는 식이니까 나중에 책임도 한국이 지라는 얘기다.

프레시안 : 그렇게 보면 미국도 4개국 공동조사에 나설 유인이 없는 것 같다.

백낙청 : 국제 공동조사는 국민들의 압력이 상당해서 한국 정부가 일종의 출구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사태가 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사태가 온다면 미국은 역시 '한국이 하겠다는데 지지하겠다'고 나올 것이다. 미국 스스로 앞장서서 하겠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고, 앞장서서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이 하자고 하면 '알겠다. 한국 정부하고 잘 얘기해 봐라'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프레시안 : 천안함을 계기로 '한·미·일 대(對) 북·중·러' 신냉전이 부활한다는 말이 있다.

백낙청 : 지금은 국제적 상황이 너무 유동적이라서 그런 식으로 고착된 대립관계가 다시 나오긴 어렵다. 그런 구도가 부활하더라도 엄청나게 비대칭적인 관계가 된다. 예전엔 크게 보아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대립구도였는데 지금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중국도 당시와 같은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다. 또 두 나라 모두 한국과 수교했고 많은 교류와 경제협력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두 나라하고만 연대한 북과, 미·일은 물론 중·러를 비롯한 다른 많은 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의 대치가 안정적일 수는 없다. 북이 핵무기라도 가져야겠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정세는 이처럼 불안정하고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가거나 아니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본다. 안정된 대립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정부의 천안함 발표에 대해 불신이 많고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심증도 퍼져 있지만 그래도 북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백낙청 : 북 소행이라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검토할 때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것뿐이다.

북한 체제는 근본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데다가 지금 어려운 고비에 와 있다. 또 내부에 극렬분자의 존재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김정일 위원장의 정책적 판단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망동을 누가 저질렀을 수 있다. 따라서 북의 소행일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김태영 국방장관 말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하는 게 맞다.(웃음) 다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정부가 발표한 사실을 포함해 관련 사실을 하나씩 좁혀가다 보면 북 공격설의 입지가 점점 위축되지 않는가 한다.

프레시안 : 이대로 가다간 사건의 진실이 영영 밝혀지지 않고 미제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백낙청 : 많은 이들이 제기하는 의문점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자료공개를 거부하고 국제사회에서도 계속 뻗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럴 경우 적어도 앞으로 2년 반 동안은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더라도 안타깝지만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바탕으로 대응해가는 수밖에 없다.

천안함사건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정운영체제가 얼마나 엉망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민주사회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질서를 갖춘 독재사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함부로 벌어지는 사회라는 게 입증됐다. 사건이 북의 소행이라고 해도 대응책이 그게 뭔가?

또 만약 북의 소행이 아닌 다른 사고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고를 은폐해서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없도록 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공안사범으로 몰고, 언론을 통제하고 언론인 스스로 자발적으로 협조하게 만들고…, 이런 건 건전한 사회의 운영방식이 아니다.

천안함 사태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렇듯 우리 사회의 건전성, 국정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사건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언론의 천안함 보도에 대해 얘기를 좀 하겠다. 최근에 언론3단체(전국언론인노동조합·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가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를 만들고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신문, 방송에서 거의 안 다루더라.

천안함사건 보도에 모범적이었다고 할 <프레시안>에서조차 기사가 안 보였다. <한겨레>의 경우는 다른 사안에서는 독립언론의 대표격이라 알아줄 만한데 그동안 천안함사건 보도에서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본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얘기들을 신문이 일일이 써줄 필요는 없지만, 이번에 나온 보고서는 대표적인 언론단체들이 만들어낸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지난달 24일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백낙청 : l이번 대통령 담화는 거의 초법적인 조치였다. 형식상 대통령 담화니까 청와대에서 하든 전쟁기념관에서 하든 엿장수 마음이지만 그런 식으로 지난 20여년간의 국가정책을 뒤집는 내용의 담화를 국회와의 협의나 국민여론의 수렴과정도 없이 발표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정부에 의하더라도 천안함 합동조사단의 발표는 7월 20일에야 최종발표가 나온다는데, 그렇다면 5월 20일 발표는 중간발표에 불과한 것 아닌가. 더구나 그런 부실하고 의문투성이인 중간발표를 바탕으로 한갓 담화를 통해 그동안의 남북간 합의, 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남북관계발전법을 비롯한 온갖 성과를 일거에 무너뜨리겠다는 거다.

이건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만을 뒤엎은 게 아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은 7·7선언 이래 남북관계 22년의 성과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관계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주의를 다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행위다.

다만 형식이 대통령 담화였기 때문에 그 내용을 새로운 담화로 다시 뒤집을 여지가 있고, 국민과 국회의 압력으로 그 실행을 유보할 수도 있다. 6.2 지방선거를 통해 그런 여지가 넓어졌다. 이걸 대한민국 국회와 시민사회가 내버려두면 일종의 '할부제 헌정질서 교란'을 묵인하는 꼴이다.(웃음)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시불로 정변을 일으켰고, 전두환은 12.12와 5.17의 2회 할부로 헌정질서를 뒤집었다. 이번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안하는 대신 5년 장기 할부제로 야금야금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지난 10년간 6.15 공동선언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남북은 그동안 7.4공동성명, 10.4선언 등 여러 합의를 내왔는데 그 중에서도 6.15 공동선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낙청 : 6.15선언의 의의를 밝히려면 그 전에 나왔던 합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는 게 중요하다. 10.4선언은 6.15선언을 바탕으로 일종의 실천강령을 만든 거니까 6.15선언이 더 근본적인 거라고 말해도 10.4선언 지지자들이 전혀 섭섭해하지 않을 거다.

7.4공동성명은 남북통일의 3대 원칙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남북조절위원회 등 구체적인 조치들은 금세 중단됐고 통일의 3대 원칙도 한동안 진전이 없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남북 당국간 합의문이고 통일원칙을 밝혔다는 정도의 의미에 그친다.

거기에 비하면 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훨씬 진전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6.15선언을 앞지르는 게 많은데, 두 가지 면에서 6.15선언만한 의의를 갖지 못한다.

첫째, 기본합의서는 정상 간에 직접 타결해서 서명된 게 아니라 총리급이 서명했다는 점이다. 북 체제에서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서명하지 않은 문건은 언제든 바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은 물론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기본합의서가 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둘째, 남북간 합의를 할 때 늘 걸리는 문제가 통일방안이었다. 특히 북은 통일방안 같은 '근본문제'를 젖혀두고 지엽적인 합의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기본합의서 채택 때 북은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중·러가 한국과 수교하는 등 매우 다급했던 것 같다. 그렇게 몰리는 입장에서 많이 양보해서 통일방안 문제를 비켜가면서 합의를 했던 거다. 그래서 거기엔 '남과 북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지향 상태의 잠정적 특수 관계'라는 언급만 있지 잠정적 특수관계를 어떻게 통일로 연결시키겠다는 얘기는 없다.

그런데 6.15선언 2항에 보면 극히 모호하지만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가 있다. 양쪽 방안에 공통점이 있고, 앞으로 그 방향으로 가겠다는 의지가 있다. 당장 후속대책이 나온 건 아니지만 그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기본합의서의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교류협력조항들에 비해 훨씬 막연한 합의문인데도 종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됐다. 6.15 전과 후의 교류 수준은 완전 딴판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6.15에 대해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기본합의서가 더 좋다고 했다가, 모든 합의의 정신을 존중하겠다는 선까지 한때 진전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 담화로 모든 남북교류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기본합의서까지도 파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다만 명시적으로 기본합의서, 6.15선언 등을 파기하겠다고 말하진 않았기 때문에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남아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개성공단도 누구 표현대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긴 하지만 소생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러나 6.15선언 10주년을 이런 상태로 맞는 심경은 참담할 수밖에 없다.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금 상황만 보자면 6.15선언 이후 10년 동안 생각만큼 많은 진전을 이끌진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백낙청 : 어느 한 가지를 딱 집을 수는 없다. 가령 북은 6.15선언을 계기로 남북문제를 함께 풀어가자는 쪽으로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보는데, 그 내부에도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워낙 많고 세력갈등도 많아서 북은 북대로 여러 한계에 봉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6.15선언 이후 상황에서 결정타로 작용했던 건 미국의 정권교체였다.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고 한 6년간은 남북관계에 온갖 장애물이 만들어졌다. 그나마 한국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있었기 때문에 더 악화되진 않았다. 그들의 영향력에다가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부시의 패배가 겹치면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 한반도문제 해결의 주된 전선은 남쪽 사회 내부"

그래서 나는 2006년 말부터는 한반도문제 해결의 주된 전선이 남쪽 사회 내부로 옮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전에는 북미대립이 제일 큰 문제였고 주된 전선이었지만 그 후로 남쪽이 하기에 달린 상황이 전개됐다. 그래서 2007년에 한국 정부가 미국의 태도변화를 활용해 2차 정상회담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북화해와 민주화의 전진을 추구하는 세력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잇달아 패했다. 주 전선에서 패배하고 나니까 남북관계가 잘 풀릴 리 없었다. 미국에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든 누가 들어서든, 북이 성의를 더 보이든 덜 보이든 상관없이 남쪽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문제를 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것은 2008년 이후의 사태진전이 입증하고 있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해서 북이 서둘러 로켓을 발사하고 2차 핵실험을 한 게 잘한 건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 남쪽에서 일을 잘 풀어나갔으면 안 일어났을 일들이다.

남쪽 사회로 주 전선이 이동했다면 그만큼 정부뿐만 아니라 남한 국민들의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초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고 일반 국민들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정상회담 같은 것은 물론이고 경협을 보더라도 정부가 주도하고 그 다음으로는 기업의 역할이 크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보조역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길게 보면 민주화와 맞물린 남북관계 발전을 지속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또 4대강을 지켜내는 일, 언론자유와 공정성을 지켜내는 일을 시민들이 얼마나 잘 하느냐도 한반도문제 해결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면 흔히 '남북관계를 어떻게 시민사회가 좌우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나는 당국간의 행위로만 분단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게 바로 한반도 분단의 특징이라고 본다.

베트남은 전인민이 동원돼서 총력전을 폈지만 어쨌든 정부 주도의 무력통일이었고, 독일도 시민사회의 작용으로 통일의 가능성이 열렸지만 신속한 흡수통일로 마무리지은 건 정부였다. 예멘은 쌍방 지도자들의 담합으로 통일이 됐다. 그런데 한반도에선 그 어느 방식도 안 통하게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어떤 진전을 이룩했다고 해서 그대로 놔두면 반전될 위험에 반드시 처한다.

그래서 남북관계도 개선돼야 하지만 남녘의 시민사회 자체로서도 진정한 법치, 건전한 상식, 기본적인 교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훨씬 더 전면적이고 다양하게 전개해야 한다. 마침 천안함사태의 진실규명 작업은 양쪽을 묶어주는 고리다. 데모나 규탄대회 같은 형식으로 풀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전문성도 동원해야 하고, 반대로 너무 전문가적 논의에 빠져드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른 국내현안과 연결시켜서 보는 시야도 확보해야 하고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프레시안 : 시민사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역시 정부의 역할이 크다. 한반도문제 해결의 주전선이 남한 사회 내부로 왔다면 2012년 대선이 분수령이 될 텐데, 어떻게 보는가.

백낙청 : 물론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2012년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에 역행하는 정부권력, 그리고 여기에 맹종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회 등 지금의 조건이 몹시 열악하지만, 정부의 일방통행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고 새로운 세력을 키워가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는 한숨 돌린 데 불과하다고 앞서 말한 것이 그런 뜻이다.

프레시안 : 북한은 2006년에 1차 핵실험을 해서 부시 대통령의 태도를 바꿔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재와 압박이 강화된다면 또다시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많은데.

백낙청 : 천안함 관련해서 만약에 중국이나 러시아까지 대북압박에 동조하면 3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1차 핵실험에 대해 북쪽 사람들은 너무 한 면만 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핵실험 이후 부시 행정부 태도가 바뀌고 협상이 어느 정도 되는 등 효과가 좋았던 점만 보려고 한 거다.

핵실험 때문에 미국이나 남한 사회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얼마나 늘었는가를 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저 북한정권의 인기가 내려갔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천안함 사건 같은 게 터졌을 때 자신들의 입지가 얼마나 좁아지는지, 그런 계산을 못한 것이다.

쉬운 예로, 북이 핵실험을 안했던들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비핵·개방·3000' 같은 엉터리 공약이 먹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북한은 워낙 이상한 애들이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합조단이 어떤 발표를 해도 야당마저 정면으로 반박하기를 꺼리곤 한다.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하고 '바로 이 짓을 한 것'은 천양지차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프레시안 :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강경하니까 우리도 강경하게 나간다'고 말한다.

백낙청 : 우리 내부의 상황으로 미루어본다면 북에서도 화해·협력이 진행되면 섭섭할 사람들이 특히 권력층에 많지 않겠는가. 그런 세력은 북측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해도 통쾌해할 텐데 만약 하지도 않았는데 남쪽이 자진해서 대결정책을 펴고 있다면 얼마나 좋아하겠나. 지금 이명박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는 것에 대해 '봐라, 이런 놈들하고 무슨 협력을 하고 화해를 하겠다고 했느냐' 하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 : 북한의 대응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백낙청 : 6.15선언의 실천을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북에 '너무 과민하게 대응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나 역시 그런 조언을 하고 싶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장기적으로 남녘 민심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6.15선언 이후 나타난 사회적 변화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

백낙청 : 거대 언론들이 국민의 '안보불감증'을 탓하는데 실은 이것이 6.15 이후 변화된 한반도 정세에 적응한 체질일 수 있다. 만일 6.15선언 이전의 체질로 천안함사건을 맞았더라면 한국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고, 선거에서 심판받아야 할 정당에 오히려 몰표를 주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별로 없었고, 옛날엔 보수측에 표가 집중됐던 소위 '접적지역'인 파주, 고성 이런 데서 모두 야당이 이겼다. 그건 6.15선언 이후 10년 동안 남북화해의 진전이 이들 지역에서 생활상의 이득과 직결되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한때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다가 요즘 와서는 이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면전은 절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결국 한국에서는 6.15선언이 만들어놓은 경제적 기반을 흔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6.15선언은 그만큼 우리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그것의 폐기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황준호 기자, 안은별 기자

/프레시안 2010.06.10. 08: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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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白樂晴] (영문학자/문학평론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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